아침부터 로마에서 폼페이로 약 3시간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갔다.잿더미 속에 묻혀 있던 고대 도시, 또 언제 화산재에 묻힐지 모르는 도시. 그래서 꼭 와야 한다는 폼페이우스1784년 우연히 세상에 나타난 고대 도시 폼페이.폼페이는 기원전 8세기경부터 이루어진 도시이며 주변의 그리스 식민지의 영향으로 성장하는 항구 도시였다.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을 때에는 로마 귀족의 방탕한 휴양지로 쓰인 곳이다.그러나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산의 엄청난 화산 폭발로 폼페이의 전 지역이 모두 화산재 아래로 가라앉게 됐다.잊혀진 도시가 18세기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고 폼페이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폼페이 유적지는 당시 매우 살린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거의 정방향의 구획을 계획 도시로서 첨단 생활 시설이 갖춰졌으며 고대 도시 국가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발달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약 2만명의 시민이 살던 폼페이는 원형 극장이나 포럼, 주택, 상수도 시설 등을 갖추고 있는 개발한 도시였다.와인과 가룸(생선 발효 식품)생산이 번성하고, 검투사 경기가 상설적으로 열리고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을 모시는 신전과 인도인,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될 만큼 번화한 도시였다.마리나문 도착전 폼페이 유적 풍경 1)마리나문폼페이 유적 입구. 튼튼한 벽돌 구조가 인상적이다. 보행자를 위한 통로와 마차와 가축 출입문 등 2개의 문으로 구성돼 있다. 문을 통과하면 나오는 길이 마리나 거리(Vadela Marina)로 이 길을 따라 폼페이 시내로 진입한다. 2) 포룸(Foro)입구에서 만나는 첫 번째 광장이자 폼페이 유적지 중 가장 큰 광장이다. 마차가 들어올 수 없었던 보행자 전용 구역으로 도시 전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주변은 정치, 경제, 종교, 행정의 중심지였던 의회, 제우스의 신천, 시청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제우스 신전사제들만 드나들 수 있었던 신성한 구역으로 기원전 2세기에 지어졌다. 제우스, 헤라, 미네르바의 3신상이 놓여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정면에는 코린트식 기둥이 세워져 있고, 멀리 베수비오스 화산을 배경으로 사진이 찍히면 너무 멋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아폴로 신전행사장 왼쪽에 있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건물로 코리토 기둥 48개에 둘러싸여 있다 비록 모조품이지만 활을 쏘는 아폴로 흉상을 볼 수 있다. 3) 바실리카당시 시민생활과 상업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으로 폼페이에서 가장 중요한 곳. 지금은 밑동만 남아 있는 원주가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재판을 집행하고 경제, 법률문제 등을 처리해 각종 사업회담도 열리던 곳으로 추정한다.외벽은 거의 무너졌지만 넓은 공간 안에 늘어서 있는 기둥 뿌리로 보아 상당히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기둥이 절단된 것처럼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쉽게 무너질 것 같지만 오히려 잘 견딜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 사이에 접착제를 사용하여 단단하게 돌과 돌을 연결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형 있게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28개의 큰 원기둥에 둘러싸인 본당 1개와 중앙 옆에 2개의 복도가 있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다.기둥을 세울 때 벽돌을 쌓듯이 여러 개의 기둥을 이어 붙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4) 로마식 도로직선과 격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으며, 광장포럼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간선도로를 배치한마차나 수레 등이 지나간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길 양쪽으로 물길도 나 있다. 도로에는 횡단보도 역할을 하는 징검다리도 설치했다. 이 돌은 마차 바퀴가 돌과 돌 사이를 지나가는 과속방지 혹 역할을 했다길 양쪽으로 사람이 다니는 길은 노면보다 높게 하여 도로와 인도를 구분하였다.거북이 등껍질처럼 디자인해 비나 물을 튀기고 발을 건조시켜 폼페이 거리의 빗물, 오물, 동물 배설물로부터 보호했다.도로 양쪽으로 지금의 도시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집들이 마차가 달리는 소리로 많이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도로가 마차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일방통행 또는 금지구역이 있었다고 한다.도로 바닥에 깔린 돌 사이에 하얀 돌이 있다. 이 돌은 야광석으로 어두운 밤에 달빛이나 횃불을 반사시켜 길을 밝히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공공 수도길가에는 공공 식수와 납으로 만든 수도관도 그대로 남아 있다. 공공수도는 신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대부분의 도로 교차로에 분수형으로 설치하여 하루 종일 깨끗한 물이 흘렀다고 한다. 지금까지 발굴된 공공수도는 38곳이다. 5) 지역 상업 식당폼페이의 주요 상업 지구는 최근 재래시장과 같은 곳이지만 빵집, 대장간, 미용실, 세탁소 등 다양한 상가가 있다.가게 매장이지만 구멍 속에 그날 팔아야 할 음료와 음식을 보관했다고 한다. 베이커리빵과 피자를 굽던 화덕과 주변 시설이 보인다.여러 대형 제분기를 포함하여 제분시설과 제빵시설을 모두 갖춘 규모의 빵집으로 피자를 구운 화덕 유흥가지중해 해안에서 가장 큰 풍요를 누린 도시로 술이 다른 도시보다 8배 이상 높아 환락도시로 유명했다.온갖 야한 그림과 낙서가 즐비한 창녀들이 있는 방이 2층 건물로 각 층에 5개의 방이 있고 방마다 돌로 만든 침대가 있다. 방 위쪽에 방 주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벽화가 있는데, 손님들은 그 그림을 보고 선택해서 들어갔다고 한다.발굴된 주택과 건물에 이름과 번호를 부여했다. 14개 장사가 끝나고 문을 닫기 위해 철문을 내리는데 지금처럼 철문을 내린 흔적을 볼 수 있다. 6) 가정집마당에는 분수대도 갖춰져 있어 모자이크식 대리석 조각이 아름답다. 7) 원형 극장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의 극장으로 움푹 파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만들었다. 계단 하단과 무대 시설이 남아 있고 무대가 바다로 향하고 있어 바다가 무대 배경처럼 보였다. 관중석 맨 아래 흰색 대리석은 (4열) 상류층 남성을 위한 특별석이다.비가 오거나 날씨가 무더우면 콜로세움과 마찬가지로 극장 위에 베릴륨이라 불리는 텐트를 쳐 햇볕과 비를 막았다고 전해진다.원형극장에서 바라본 주변 유적지 8) 사각회랑대극장 앞에 있는 사각형의 광장으로 열주들이 둘러싸고 있다. 관객들의 휴식처나 대기장으로 쓰였고 검투사들의 숙소로 쓰였다고 한다. 기원전 80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2만 명을 수용하고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3층짜리 관중석을 갖고 있다는 원형극장은 가본 적이 없다. 9) 폼페이의 유물폼페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정교한 모자이크, 그 시대에 사용된 그릇, 조각상 등으로 피할 수 없고 화산재 속에서 죽어간 사람의 모양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나 2만 명이 살았다는 도시 유물치고는 적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현재 많은 유물이 폼페이에 전시되어 있지 않고 나폴리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당시 적나라하고 개방적인 성에 관련된 유물과 전설처럼 회자되는 몇몇 인물상도 마찬가지다.마지막 날, 갑자기 고통스럽게 사라져간 영혼을 달래며 폼페이 유적지를 나와 기차역으로 가는 길이 깨끗했다.